모성의 디스토피아 / 우노 츠네히로(우노 쓰네히로)
머리말을 대신하여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토미노 요시유키(富野由悠季), 오시이 마모루(押井守)---이 책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견인한 작가들에 대해 논한다.
어째서 지금 애니메이션인가.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이미 현대는 애니메이션을, 서브컬처를 논하고 있을 시대가 아닌 것은 아닌가, 하며.
분명 현대는 위기의 시대다.
EU 탈퇴를 결정한 영국의 국민투표(Brexit),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출현, 그리고 시리아 내전을 계기로 새로운 냉전과 그 연장선상에 있는 3차 세계대전의 조짐---지난 2016년의 세계를 얼핏만 봐도 이미 명백하다.
글로벌/정보화의 급속한 진행과 그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으로서 나타난 국수주의의 분출, 그에 따라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세계사의 불온한 흐름 안에서 일본의 서브컬처에 대해, 더구나 애니메이션에 대해 논하는 것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이러한 정황에서는 애니메이션 ‘따위’에 대해 논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반대로 내가 묻고 싶다.
정말로 논할 가치가 있는 것이 지금 일본의 현실 어디에 존재하는가.
난민을 내쫓고, 이민자에 대한 문을 닫아걸고, 지나가 버린 과거의 성공 추억만 반추하며 글로벌화도 정보화도 내팽개친 일본의 어디 누구에게 세계의, 영국의, 미국의 정황에 대해 논할 자격이 있다는 것일까.
단언컨대 지금 일본에서 현대의 위기에 대해, 세계의 격동에 대해 논하는 것은 꼴사납다.
다문화주의의 이상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이민자를 배제한 중산 계급이 사는 한적한 주택지’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서유럽의 전후(戰後) 중산층이 빠진 기만에 대해 깨나른하게 중얼대는 것도, 정보기술과 시장(市場)을 통해 세계를 바꾸겠다고 호기롭게 외치는 미국 서해안의 창업가와 엔지니어들의 히피(hippie)에 뿌리를 둔 낙관주의와 유토피아 사상의 기만에 대해 탄식하는 것도 손쉽다. 그러나 이런 ‘안전하게 아픈’ 비평을 주절거리며 안심하기 전에, 이러한 세계의 조류에 대해 일본에서 논하는 행태의 우스꽝스러움에 우리는 좀 더 예민해져야 할 것이다.
머리말을 대신하여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토미노 요시유키(富野由悠季), 오시이 마모루(押井守)---이 책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견인한 작가들에 대해 논한다.
어째서 지금 애니메이션인가.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이미 현대는 애니메이션을, 서브컬처를 논하고 있을 시대가 아닌 것은 아닌가, 하며.
분명 현대는 위기의 시대다.
EU 탈퇴를 결정한 영국의 국민투표(Brexit),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출현, 그리고 시리아 내전을 계기로 새로운 냉전과 그 연장선상에 있는 3차 세계대전의 조짐---지난 2016년의 세계를 얼핏만 봐도 이미 명백하다.
글로벌/정보화의 급속한 진행과 그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으로서 나타난 국수주의의 분출, 그에 따라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세계사의 불온한 흐름 안에서 일본의 서브컬처에 대해, 더구나 애니메이션에 대해 논하는 것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이러한 정황에서는 애니메이션 ‘따위’에 대해 논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반대로 내가 묻고 싶다.
정말로 논할 가치가 있는 것이 지금 일본의 현실 어디에 존재하는가.
난민을 내쫓고, 이민자에 대한 문을 닫아걸고, 지나가 버린 과거의 성공 추억만 반추하며 글로벌화도 정보화도 내팽개친 일본의 어디 누구에게 세계의, 영국의, 미국의 정황에 대해 논할 자격이 있다는 것일까.
단언컨대 지금 일본에서 현대의 위기에 대해, 세계의 격동에 대해 논하는 것은 꼴사납다.
다문화주의의 이상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이민자를 배제한 중산 계급이 사는 한적한 주택지’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서유럽의 전후(戰後) 중산층이 빠진 기만에 대해 깨나른하게 중얼대는 것도, 정보기술과 시장(市場)을 통해 세계를 바꾸겠다고 호기롭게 외치는 미국 서해안의 창업가와 엔지니어들의 히피(hippie)에 뿌리를 둔 낙관주의와 유토피아 사상의 기만에 대해 탄식하는 것도 손쉽다. 그러나 이런 ‘안전하게 아픈’ 비평을 주절거리며 안심하기 전에, 이러한 세계의 조류에 대해 일본에서 논하는 행태의 우스꽝스러움에 우리는 좀 더 예민해져야 할 것이다.
(역주: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 주를 지칭함. 애플, 구글, 인텔 등의 혁신기업이 캘리포니아(실리콘밸리)를 근거지로 활동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본사도 워싱턴 주에 있다.)
(역주: 안전한 곳에 앉아 아픔에 통감하는 척하는. 저자의 여러 독자적인 비평 용어 중 하나.)
우선은 자신의 주변부터 살피는 것이 바람직하다.
깨닫고 보면 일본은, 시대에 뒤쳐졌고 완전히 막혀있다.
지난 25년 동안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양쪽 모두 이류국가로 전락한 일본은 <<역사의 종언>>을 비웃으며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국제사회, 그것도 ‘아무도 원하지 않는 형태로 시작된 국제사회’의 무대에 오르는 일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깨닫고 보면 일본은, 시대에 뒤쳐졌고 완전히 막혀있다.
지난 25년 동안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양쪽 모두 이류국가로 전락한 일본은 <<역사의 종언>>을 비웃으며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국제사회, 그것도 ‘아무도 원하지 않는 형태로 시작된 국제사회’의 무대에 오르는 일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역주: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1989년에 논문, 1992년에 책으로 출판하며 내세운 이론. 1989년을 냉전의 종식으로 보고, 헤겔-마르크스주의적 역사는 끝나고 앞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발전과 평화만이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이와 상반되는 주장을 담았던 저작이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논문 1993년, 책 1996년)이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이 2015년부터 ISIS의 테러에 세계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본의 정치는 촌극이 된 지 오래고, 경제는 공업사회 측면에서 한때 << Japan as Number One >>이라고 불리던 무렵의 비대한 자아상에 여전히 도취된 사람들이, 딱히 무언가를 창출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누워서 괴사를 기다리고 있다.
일본의 정치는 촌극이 된 지 오래고, 경제는 공업사회 측면에서 한때 << Japan as Number One >>이라고 불리던 무렵의 비대한 자아상에 여전히 도취된 사람들이, 딱히 무언가를 창출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누워서 괴사를 기다리고 있다.
(역주: 일본의 정치는 (반대하는 정당끼리도) 뒤에서 미리 질의응답을 다 정한 후 국민들 앞에서는 각본대로 외우기만 하는 삼류 연극을 펼친다는 비판을 오래 전부터 받아 왔다.)
(역주: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사회학 교수가 1979년에 낸 책의 이름. 미국은 일본의 성공을 배워야 한다는 내용.)
말하자면 이 나라와 이 사회는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뿐인 상황이면서도, 그 상황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다.
이렇게 ‘잃어버린 10년’을 20년으로 갱신하고, 이제는 30년으로 연장하려는 일본 경제의 어디에 논할 가치가 있다는 것일까.
말하자면 이 나라와 이 사회는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뿐인 상황이면서도, 그 상황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다.
이렇게 ‘잃어버린 10년’을 20년으로 갱신하고, 이제는 30년으로 연장하려는 일본 경제의 어디에 논할 가치가 있다는 것일까.
25년 동안 희망을 하나씩 하나씩 잃고, 이미 예정된 미래가 보이는 듯한 오늘날, 그 수많은 희망이 얼마나 공허하고 얼마나 저속했는지, 그럼에도 희망에 필요한 에너지가 얼마나 방대했는지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이만큼의 에너지를 절망에 쓸 바에야, 좀 더 어떻게든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나는 앞으로의 일본에 희망을 품기 힘들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은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일본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무기적(無機的)인, 텅 빈, 뉴트럴(neutral)한, 중간색의, 부유(富裕)한, 빈틈이 없는 어떤 경제 대국이 극동의 일각에 남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말을 섞을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역주: 이 글은 <<미시마 유키오의 문화방위론---문화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자음과모음, 2013년)에도 수록되어 있다.)
(미시마 유키오, <지키지 못한 약속---내 안의 25년(果たし得てゐない約束---私の中の二十五年)>, <<결정판 미시마 유키오 전집 36>> 신초샤(新潮社), 2003년)
이것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자결 전에 남긴 유언 성격의 에세이에서 발췌한 것이다. 미시마가 이 유언을 쓴 1970년으로부터 50년이 지나려는 지금의 정황은, 미시마가 상정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일본은 무기적이고 텅 비어있다. 단어에 내포된 가장 나쁜 의미로서의 뉴트럴이나 중간색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새 부유하지도, 빈틈없지도 않게 되었기 때문에 경제 ‘대’국의 위치에서는 실질적으로 내려왔다.
미시마가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말을 섞을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라고 한 것처럼, 나 역시 이 현실에 대해 논할 가치를 찾기 힘들다.
물론 그 우스꽝스러움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더욱 더 이 현실에 바짝 다가가야만 한다, 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은 일에 한정된 인생의 시간을 소모하는 걸 의미한다.
실제로 일본의 언론은 이 변변찮은 현실에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로 빈약한 메시지 밖에 발신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구체적으로 그 메시지는 사용 가능 햇수를 초과한 일본 시스템의 폐해를 지적하는 것(정치)과 글로벌/정보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말고 능숙하게 균형을 잡으라고 말하는 것(문학)이다. 그리고 3.11 지진 이후 일본은 실제로 이런 공허한 말과 글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하는 부분은, 나는 이러한 변변찮은 현실에 조응한 빈약한 언론들에 딱히 반론은 없다. 오히려 반대로 그 메시지의 내용 그 자체에는 완전히 공감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전자(정치)는 마이너스를 제로로 만들기 위해 물통 바닥에 뚫린 구멍을 메우는 작업과 같은 것이고, 후자(문학)는 여름에 늘어나는 열사병에 대한 경종으로서 수분 보충의 중요성을 알리는 계몽활동과 유사한 것으로, 이러한 일반론 종류에는 의미 있는 반론의 가능성도 필요성도 없다. 당연히 물통 바닥의 구멍은 메워야 하고, 여름철 수분 보충은 신경 써서 나쁠 것 없다.
그래서 결국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내가 절망하고 있는 것은 우선 이 절망적인 현실 그 자체에 대해서이고, 두 번째는 그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사실상 아무 내용이 없는 상식론으로 겉만 번지르르하게 감싸는 일밖에 하지 않는 일본의 언론에 대해서다.
그렇다. 우리는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이미 일본의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모두 촌극이며, 그것이 촌극임을 지적하는 일 외에 논할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현실로부터 우리는 눈을 돌려선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한 번, 현실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만두려 한다. 철저하게 허구에 대해, 서브컬처에 대해, 애니메이션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일단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너무나 보잘것없는 일본의 현실에 평범한 상식론으로 대항하는 것과 미야자키 하야오, 토미노 요시유키, 오시이 마모루라는 고유명사에 대해 생각하는 것, 어느 쪽이 장기적이자 진정한 의미로 인류에게 생산적인 일일까. 상상력이 필요한 일은 어느 쪽일까.
아베 신조나 SEALDs에 대해 말하는 것과 나우시카, 샤아에 대해 말하는 것 중 어느 쪽에 가치가 있을까. 답은 명백하지 않을까.
(역주: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학생들의 긴급행동, Students Emergency Action for Liberal Democracys. 2015년 5월 공식으로 발족한 일본 학생들의 정치단체. 아베 정권의 헌법 개정 움직임에 반대해서 활동을 시작. 법안이 통과된 후에는 단체명을 바꿔서 반 아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모든 것이 촌극이 되어버리고, 세계·시대 모두에 뒤처진 일본의 현실 어디에 논할 가치가 있다는 것일까. 지금 이 나라에 애니메이션 보다 더 논할 가치가 있는 것이 어디 있을까.
그건 당신이 나태해서 그렇다, 변변찮은 현실과 마주할 용기가 없는 거 아니냐, 라고 지탄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언하지만, 나는 이런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은 일로부터 도망쳤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근거 없는 어마어마한 비방과 질시를 받으면서도 자체적인 미디어를 10년간 계속 운영했고, 매주 죽은 생선 같은 눈을 하고 오직 그것이 촌극임을 전하기 위해 TV 와이드쇼에도 출연했고, 보수 정치가와 공저로 책을 내서 좌익 지식인으로부터 매도도 당했고, 헤이트스피치와 역사수정주의를 비판해서 우익의 가두선전차에게 업무방해를 받으면서도 그러한 행동들을 내팽개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일본에 필요한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고, ‘이 나라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라고 안전한 영역에 앉아 투덜거리며 공감을 모으는 따위의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촌극이 되어버리고, 세계·시대 모두에 뒤처진 일본의 현실 어디에 논할 가치가 있다는 것일까. 지금 이 나라에 애니메이션 보다 더 논할 가치가 있는 것이 어디 있을까.
그건 당신이 나태해서 그렇다, 변변찮은 현실과 마주할 용기가 없는 거 아니냐, 라고 지탄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언하지만, 나는 이런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은 일로부터 도망쳤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근거 없는 어마어마한 비방과 질시를 받으면서도 자체적인 미디어를 10년간 계속 운영했고, 매주 죽은 생선 같은 눈을 하고 오직 그것이 촌극임을 전하기 위해 TV 와이드쇼에도 출연했고, 보수 정치가와 공저로 책을 내서 좌익 지식인으로부터 매도도 당했고, 헤이트스피치와 역사수정주의를 비판해서 우익의 가두선전차에게 업무방해를 받으면서도 그러한 행동들을 내팽개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일본에 필요한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고, ‘이 나라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라고 안전한 영역에 앉아 투덜거리며 공감을 모으는 따위의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주: 저자는 2002년 2월 ‘행성개발위원회’라는 웹사이트를 열고, 2005년 12월에 인디 비평 잡지 < PLANETS >을 창간해서 2018년 8월 현재까지 간행하고 있다. 2015년 4월부터는 니혼TV의 아침 생방송 정보방송 <슷키리>에 고정 패널로 출연했는데, APA호텔이 ‘난징 학살은 날조다’라는 내용이 담긴 도서를 모든 객실에 비치한 사건에 대해 ‘역사수정주의’라며 비판한 건으로 2년 6개월 만에 하차하게 된다. 방송이 나간 후 우익 쪽의 가두선전차(대한민국에서는 주로 선거 때 사용하는 스피커 달린 유세 차량)가 방송국 앞에 몰려들었고, 압박을 받은 PD가 패널 교체를 지시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평소에도 생방송 중 우익을 비판하지 말라는 방송국의 지시가 있었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비판하지 않을 문화라는 것을 알기에 단념하지 않고 계속 해왔다고 저자 본인이 트위터를 통해 알렸고, 한동안 화제가 되었다.)
나는 이 물통의 바닥에 뚫린 구멍을 메우는 일로부터,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은 일로부터 도망쳤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이제 충분하다.
한 번 더 단언한다. 지금의 일본에 진정한 의미로 논할 가치가 있는 현실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나라의 현실에 상상력이 필요한 일은 하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철저하게 허구에 대해 생각한다. 서브컬처에 대해, 애니메이션에 대해 생각한다. 이 나라의 전후(戰後)라는 시대 안에서 기형적인 발전을 보인 상업 애니메이션의 상상력을 통해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순도 100퍼센트의 허구세계야말로 결과적으로 드러나 있던 시대의 본질을 잡아내고, 전후 애니메이션을 견인해 온 천재들이 그 본질과 어떻게 대치했는가를 논하는 작업을 통해 처음으로 우리는 현대의 진정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서 기묘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는 전후 일본의 상업 애니메이션의 상상력---그것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문화 쇄국적인 전후 사회와 비대한 정보 환경이 초래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빛 좋은 개살구가 보인 기형적인 발전 안에서 전개된 상상력을 사용해서, 암초에 걸려 꼼짝 못하는 오늘날의 정보사회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각도로부터 다시 인식하고 다른 탈출구를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이 책은 이러한 사고실험(思考實驗)을 정리한 책이다. 동시에 일본의 전후라는 기나긴 시간과 그 마지막에 대해 논하는 책이다. 또한 현대에 있어서의 세계와 개인, 공과 사, 정치와 문학의 관계에 대해 고찰한 책이기도 하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이 세 문제가 각각 독립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 문제는 밑바탕의, 그것도 본질적인 부분에서 이어져 있다. 아니, 이어서 봐야만 비로소 보이는 각각의 본질이 있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
피아의 압도적인 거리를 언어를 이용해 파괴하고 제로로 만드는 것.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본래대로라면 이어지지 않을 것을 잇는 것. 그것이 비평의 역할이다.
그렇기에 이 책의 독자 중 몇 할 정도는 애니메이션 평론이라고 생각해서 읽기 시작했더니 추상적인 사회론이 시작되어 당황할지도 모르고, 반대로 전후론에 관심이 있어서 책을 폈더니 애니메이션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져서 놀랄지도 모른다. 한층 더 말하면, 어쩌면 이 책이 발매되는 2017년 현재의 일본에서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 중 대다수는 TV 와이드쇼의 패널로 나를 인식하고 있을 것이고, 비평서를 내는 것 자체를 기이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곳에서 했던 말 중 약간이라도 흥미가 동하는 부분이 있었다면 이 책을 읽어주었으면 한다. 만약 내가 그 공간에서 판에 박힌 유형의 사고로부터 자유로웠다고 생각한다면(그러고 싶다고 항상 의식했지만), 그것은 내가 이렇게 허구를 통해 현실을 생각해 왔기 때문이고, 연결되지 않아야 할 것을 연결해서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라에서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는 것은 지대한 고통이 따르는 작업이다.
이러한 정황하에서 필요한 말은, 사실상 아무 내용이 없는 20세기적 이데올로기 회귀에 대한 선동도 아니고, ‘소비/정보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균형을 잡고 살아야만 한다’ 정도의 상식론을 철학과 사회학 언어로 포장한 듣기 좋은 문화론도 아니다. 하물며 [미국] 서해안에 대한 열등감을 그대로 드러낸 혁신과 인생 전략(!) 교과서도 아닐 것이다. 이 책이 현재를 주시하며 미래를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 절망적으로 공허한 정황은 어떻게 해서 탄생했는가. 그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성립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성립의 배경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전후 애니메이션의 거인들의 상상력을 빌린다. 이것은 생각해 보면 자명한 일이다.
세계에는 허구만이 잡아낼 수 있는 현실이 존재한다. 이것은 이 역설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위한 책이며, 아직은 믿을 수 없지만 믿어 봐도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 만약 믿을 수 없고, 믿어 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겠는가. (나 자신은 믿지 않지만 확고하게 존재하는 현실로서) 인간은 어째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끌리는가, 라고.
그럼 이제 상상력이 필요한 일을 시작해보자.
한 번 더 단언한다. 지금의 일본에 진정한 의미로 논할 가치가 있는 현실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나라의 현실에 상상력이 필요한 일은 하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철저하게 허구에 대해 생각한다. 서브컬처에 대해, 애니메이션에 대해 생각한다. 이 나라의 전후(戰後)라는 시대 안에서 기형적인 발전을 보인 상업 애니메이션의 상상력을 통해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순도 100퍼센트의 허구세계야말로 결과적으로 드러나 있던 시대의 본질을 잡아내고, 전후 애니메이션을 견인해 온 천재들이 그 본질과 어떻게 대치했는가를 논하는 작업을 통해 처음으로 우리는 현대의 진정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서 기묘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는 전후 일본의 상업 애니메이션의 상상력---그것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문화 쇄국적인 전후 사회와 비대한 정보 환경이 초래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빛 좋은 개살구가 보인 기형적인 발전 안에서 전개된 상상력을 사용해서, 암초에 걸려 꼼짝 못하는 오늘날의 정보사회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각도로부터 다시 인식하고 다른 탈출구를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이 책은 이러한 사고실험(思考實驗)을 정리한 책이다. 동시에 일본의 전후라는 기나긴 시간과 그 마지막에 대해 논하는 책이다. 또한 현대에 있어서의 세계와 개인, 공과 사, 정치와 문학의 관계에 대해 고찰한 책이기도 하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이 세 문제가 각각 독립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 문제는 밑바탕의, 그것도 본질적인 부분에서 이어져 있다. 아니, 이어서 봐야만 비로소 보이는 각각의 본질이 있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
피아의 압도적인 거리를 언어를 이용해 파괴하고 제로로 만드는 것.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본래대로라면 이어지지 않을 것을 잇는 것. 그것이 비평의 역할이다.
그렇기에 이 책의 독자 중 몇 할 정도는 애니메이션 평론이라고 생각해서 읽기 시작했더니 추상적인 사회론이 시작되어 당황할지도 모르고, 반대로 전후론에 관심이 있어서 책을 폈더니 애니메이션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져서 놀랄지도 모른다. 한층 더 말하면, 어쩌면 이 책이 발매되는 2017년 현재의 일본에서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 중 대다수는 TV 와이드쇼의 패널로 나를 인식하고 있을 것이고, 비평서를 내는 것 자체를 기이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곳에서 했던 말 중 약간이라도 흥미가 동하는 부분이 있었다면 이 책을 읽어주었으면 한다. 만약 내가 그 공간에서 판에 박힌 유형의 사고로부터 자유로웠다고 생각한다면(그러고 싶다고 항상 의식했지만), 그것은 내가 이렇게 허구를 통해 현실을 생각해 왔기 때문이고, 연결되지 않아야 할 것을 연결해서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라에서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는 것은 지대한 고통이 따르는 작업이다.
이러한 정황하에서 필요한 말은, 사실상 아무 내용이 없는 20세기적 이데올로기 회귀에 대한 선동도 아니고, ‘소비/정보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균형을 잡고 살아야만 한다’ 정도의 상식론을 철학과 사회학 언어로 포장한 듣기 좋은 문화론도 아니다. 하물며 [미국] 서해안에 대한 열등감을 그대로 드러낸 혁신과 인생 전략(!) 교과서도 아닐 것이다. 이 책이 현재를 주시하며 미래를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 절망적으로 공허한 정황은 어떻게 해서 탄생했는가. 그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성립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성립의 배경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전후 애니메이션의 거인들의 상상력을 빌린다. 이것은 생각해 보면 자명한 일이다.
세계에는 허구만이 잡아낼 수 있는 현실이 존재한다. 이것은 이 역설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위한 책이며, 아직은 믿을 수 없지만 믿어 봐도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 만약 믿을 수 없고, 믿어 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겠는가. (나 자신은 믿지 않지만 확고하게 존재하는 현실로서) 인간은 어째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끌리는가, 라고.
그럼 이제 상상력이 필요한 일을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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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의 디스토피아 / 우노 츠네히로
목차
머리말을 대신하여
1부 전후 사회의 관점
1. 두 ‘전후’로부터
2. ‘정치와 문학’ 다시
3. 모성의 디스토피아
4. (비대해진 모성으로서의) 일본적 정보사회
2부 전후 애니메이션의 ‘정치와 문학’
1. 일본차와 전후 애니메이션
2. ‘아톰의 명제’와 전후 민주주의
3. ‘변신’하는 전후 히어로
4. 로봇 애니메이션의 정신사
5. 전후 애니메이션, 또 하나의 명제
6. ‘고지라의 명제’와 가공의 연대기
7. ‘반(反)현실’로부터 생각한다
8. 옴 진리교와 ‘허구’의 패배
9. <에반게리온>과 전후 애니메이션의 변질
10. ‘허구 = 가상현실의 시대’에서 ‘확장현실의 시대’로
11. ‘확장현실 시대’의 상상력
3부 미야자키 하야오와 ‘모성의 유토피아’
1. 냉소주의에 패한 것은 누구인가
2. <모모노케 히메>와 아시타카의 윤리
3. 보이 미트 걸?
4. <라퓨타>라는 묘지
5. 날지 못하는 돼지들의 이야기
6. <고쿠리코 언덕에서> 고찰
7. 모성의 바다로
8. ‘어머니’적이 되는 것 / ‘소녀’적이 되는 것
9. 소녀조차도 날지 못하는 세계로
10. 새는 중력을 거스르며 나는 것은 아니다
4부 토미노 요시유키와 ‘모성의 디스토피아’
1. 신세기 선언과 ‘뉴타입’의 시대
2. 아톰을 ‘더럽힌 놈’과 <바다의 트리톤>
3. 애니메이션 로봇의 전후적 ‘신체’
4. 잠보트 / 다이탄 3
5. <기동전사 건담>과 애니메이션의 사춘기
6. 영화로서의 <건담>
7. 또 하나의 역사로서의 ‘우주세기’
8. 기형아로서의 모빌슈트
9. 혁명 없는 세계와 ‘뉴타입’ 사상
10. ‘뉴타입’에서 ‘이데’로
11. 리얼 로봇 애니메이션의 시대
12. ‘오라 배틀러’와 비대해지는 개인환상
13. 카미유 비단은 왜 미쳐야만 했는가
14. 변질되는 ‘뉴타입’
15. <역습의 샤아>와 ‘모성의 디스토피아’
16. <건담 F91>과 ‘어머니’와의 화해
17. < V건담>과 소녀성의 행방
18. <브레인 파워드>와 시대를 향한 (후퇴한) 회답
19. 우주세기에서 흑역사로
20. 소년성으로의 회귀---<오버맨 킹게이너>
21. 극장판 < Z건담>과 <린의 날개>
22. < G의 레콩기스타>와 이야기의 상실
23. 전후 로봇 애니메이션의 ‘끝’
24. 뉴타입은 흑역사를 초월하는가
5부 오시이 마모루와 ‘영상의 세기’
1. 전쟁은 여전히 시작되고 있다
2. 다카하시 루미코로부터 고찰
3. <뷰티풀 드리머>들의 선후
4. 모럴에 대해
5. 소녀들이 본 꿈
6. 방황하는 개들의 이야기
7. 만약 라무가 사기꾼이었다면
8. 특차 2과의 일상으로부터
9. 정보론으로 선회한 오시이 마모루
10. ‘연출가’로의 길
11. <기동경찰 패트레이버2 더 무비>, ‘영상의 세기’의 임계점
12. <고스트 인 더 셀 공각기동대>, 접속된 미래
13. 모든 영화는 애니메이션이 된다
14. 타자가 없는 세계, 그 <이노센스>
15. ‘아버지’로의 회귀
16. 전후사로의 퇴각전
17. 고스트와 여자 병사들
18. ‘모친 살해’의 가능성
6부 ‘정치와 문학’의 재설정
1. ‘영화의 세기’와 ‘모성의 디스토피아’
2. 전후 애니메이션의 터닝 포인트
3. 제4의 작가와 또 하나의 명제
4. 고지라의 명제, 다시
5. 헤이세이 <가메라>에서 <신 고지라>로
6. 오타쿠적 상상력의 ‘정치와 문학’
7. ‘현실’ 대 ‘허구’
8. 캘리포니안 이데올로기와 ‘영화의 세기’의 끝
9. <포켓몬GO>와 ‘거대한 게임’
10. 거신병 도쿄에 나타나다
11. ‘정치와 문학’의 재설정
12. 전후 서브컬처와 ‘네트워크의 세기’
13. 요시모토 다카아키와 모성의 정보사회
14. 또 하나의 짝환상
15. ‘정치와 문학’에서 ‘시장과 게임'으로
16. 로봇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신체
17. 상상력이 필요한 일
맺음말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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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자 원고지 2500매, 신국판 700쪽 예상.
번역 작업 중. 분량이 많아서 늦어지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분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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