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1일 토요일

우루세이 야츠라, 오시이 마모루, 모성의 디스토피아


모성의 디스토피아(하) 구매 링크 


모성의 디스토피아(상) 구매 링크 



우루세이 야츠라가 2022년에 다시금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4쿨 애니로 1년내내 방영한다고 합니다.




저희 책 모성의 디스토피아(하) 부분에서 모성의 디스토피아의 세부 예시로서 우루세이 야츠라를 다룹니다.

우노 저자님이 한국에 와서 강연했을때, 타카하시 루미코론을 쓸 생각 없냐고 질문했더니, 현재는 예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로년대의 상상력 시절부터 타카하시 루미코를 꽤 비중있게 다루고 있으니, 쓸 법도 한데 말이지요.
당시 우노 저자님이 주관하는 미디어에는 다른 저자의 아다치 미치루론이 연재되고 있었습니다.(완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가 출간되려면 아직 멀었으니, 같이 즐기고자 체험판/미리보기 느낌으로 일부를 선공개합니다.


2. 타카하시 루미코를 통해 고찰
오시이 마모루라는 창작자 안으로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타카하시 루미코라는 다른 창작자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는 오시이 마모루가 타카하시 루미코 비판을 통해 이름을 알렸던 경력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타카하시 루미코를 다루는 데에는 조금 다른 이유가 있다.
오시이 마모루에게 있어서 전쟁과 평화에 대해 묻는 건 현실과 허구, 실제 체험과 영상 체험에 대해 묻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타카하시 루미코라는 보조선을 추가로 그으면, 오시이 마모루가 그의 창작물 내부에서 펼친 현실과 허구에 대한 물음, 극영화라는 제도에 대한 자기 언급, 전쟁과 평화에 대한 물음 등, 얼핏 보면 다른 차원에서 전개되는 질문들을 하나의 선으로 이을 수 있다. 이것이 내가 타카하시 루미코를 경유해서 오시이 마모루를 논하는 이유다.

1970년대의 끝자락, 아직 20대 전반이었던 ‘신출내기 신인 만화가’ 타카하시 루미코는 잡지 <소년 선데이>에 연재한 ≪우루세이 야츠라≫로 당시의 10대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주인공 고교생(모로보시 아타루) 곁에 미소녀 우주인(라무)이 들이닥쳐 마누라 행세를 하며 동거생활을 한다, 라는 현대에도 그 흐름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러브코미디의 틀을 다듬은 이 작품은, 아무리 많은 설이나 크리스마스를 맞이해도 등장인물들이 나이를 먹지 않고 무한 루프가 반복되는 영원한 낙원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허구의 시대’를 지탱하던 상상력의 두 축 중 하나였다.
<우주전함 야마토> <기동전사 건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당시 애니메이션 붐의 중심부에 있던 이러한 작품군이 판타지적인 상상력을 이용해 사라진 (개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사의 대체물을, 숭고한 비일상의 체험을 가공 연대기로서 제공했던 것에 반해, 타카하시는 역사에 의한 의미 부여를 상실한 뒤에도 계속되는 ‘끝나지 않는 일상’(미야다이 신지의 표현)을 긍정하고 치유해주는 세계를 정비했다고 할 수 있다.
타카하시 루미코는 현대 만화·애니메이션의 중심인 미소녀 캐릭터---이른바 ‘모에’한 캐릭터 디자인---의 원형을 제시한 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아이 같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풍만한 신체를 가진 그녀들은 분명 유형성숙으로서의 전후 일본의 모습 그 자체이며, 그리고 타카하시 루미코가 그리는 미소녀들은 그 과잉된 성적인 신체를 이용해, 전후의 소비사회를 살아가는 소년들의 ‘어머니’로서, 그것도 과잉될 정도로 기능해 나갔다.
독자들의 분신 격인 소년(아타루)은, 갑자기 들이닥쳐 마누라처럼 구는 미소녀(라무)에게 사랑받는 것에 의해 무조건적인 승인을 획득한다. 이 무조건적인 승인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보이는 사랑과 동일하다. 그러나 라무의 성적 매력이 넘치는 신체는 그 모성을 가리고, 표면상으로는 소년들에게 아이가 아니라 사내일 것을 요구한다. 소년은 아내를 얻은 것처럼 착각하며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응석을 부리게 된다. 라무라는 ‘갑자기 나타난 아내’에 의해 소년은 주체성을 발휘하지 않고도 소녀를 획득, 남성성을 충족시키고 = ‘아버지’가 된다. 남성 작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무런 자각 없이 그리던, 남자들의 영락(零落)한 남성성을 의사적으로 회복시켜 주는 모성적인 필드(태내)를, 여성 작가인 타카하시는 반쯤 자각적으로, 보다 세련된 모습으로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 부분에서 아이를 얻는 것으로 남자를 얻는 것을 대체했다는 도착(倒錯)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소년의 시선으로---라무의 시점이 아니라 아타루의 시점으로---≪우루세이 야츠라≫에 대해 생각한다.
≪우루세이 야츠라≫의 무대인 토모비키 마을에는 라무 이외에도 미소녀가 방대하게 등장하고 ‘호색한’이라는 설정의 아타루는 그녀들에게 껄떡거리며 접근한다. 그렇지만 아타루에게 있어서 라무가 ‘최애’라는 전제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코미디 장르인 이 작품은 아타루가 아무런 뉘우침도 없이 ‘바람기(시늉)’를 거듭하고 라무가 질투한다(는 것으로 아타루와 라무의 절대적인 관계가 확인된다), 라는 반복으로 스토리가 이루어져 있다.
마치 슈퍼마켓 선반에서 상품을 선택하듯, 아타루 = 독자는 무수하게 등장하는 미소녀 중에서 취향에 맞는 소녀를 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라무 = 어머니 = (본)처를 향한 사랑을 부정하지 않는 한, 그녀(라무)의 태내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용서되는 의사적인 자유에 불과하다.
질투심이 많다, 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아이’를 향한 독점 의지와 정념을 표출하는 한편, 그 대상이 자신의 태내로부터 나가지 않는 범위에서는 늘,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을 허용하는 타카하시 루미코는, 뒤틀린 ‘어머니’적인 사랑의 세계를 그 후에도 집요하게 계속 반복해서 그린다.
자신의 태내에서, ‘아이’가 자신 이외의 여자와 사귀는 것을 허용한다---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머니’에게 있어서, 자신의 ‘남편’과 ‘딸’이 사귀는 것이나 다름없다.
“15세 때, 나는 매춘부였다. 매춘숙의 여주인은 내 친모였고, 딱 한 명인 손님이 양부였다……”---이것은 우치다 슌기쿠(內田春菊)의 자전적 소설 ≪파더퍼커≫의 광고에 쓰인 문장인데, 타카하시 루미코가 품고 있던 것은 아마도, 모자상간적인 환경하에 있으면서 부녀상간적인 마치스모(machismo)가 보증되는, 이 복잡하고 그로테스크한 회로의 존재에 집약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저자 주) 內田春菊 ≪ファザーファッカー≫(文春文庫, 1996)(번역서: ≪개같은 내 아버지≫ 창해, 2001).
타카하시 루미코의 독자였던 당시 전후 소비사회하의 소년들은, 이 모성의 요람 안에서 의사적인 남성성의 회복을---구체적으로는 ‘어머니’가 데려오는 무수한 ‘아가씨/딸(娘)’ = 과하게 성적인 신체를 지닌 미소녀 캐릭터들과의 유희를 통해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다. 이 시대 소년들은 우주세기라는 또 하나의 역사 안에서 모빌슈트라는 가짜 몸을 획득하는 것으로 마치스모를 회복하거나, 타카하시 루미코적인 모성의 요람 안에서 의사적인 마치스모를 부여받고 그 친‘아들’로서 어머니의 태내에 웅크린 채, 그 닫힌 세계 안에서 마치 ‘아버지’인 척 굴며 마치스모를 충족시켰던 것이다.
오츠카 에이지는 <소년 선데이>의 198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아다치 미츠루와 타카하시 루미코를 들며, 러브코미디라는 양식으로 소비사회에 있어서의 모라토리엄을 그린 두 작가를 비교했다. 그리고 아다치 미츠루의 ≪터치≫(1981~1986)가 모라토리엄의 상징인 아이들방으로부터의 ‘졸업’을 그린 반면, 타카하시 루미코의 ≪메종일각≫(1980~1987)은 재수생으로 등장하는 고다이 청년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는 성장 스토리가 표면상으로 전개되지만 그의 목적은 한결같이, 모라토리엄의 상징인 연립주택 ‘일각관’의 관리인 오토나시 쿄코를 아내로 얻는 것에 한정되어 있는 점, 그리고 그 귀결로서 이야기의 결말부에 쿄코와 결혼한 고다이 청년이 ‘졸업’해야 할 ‘일각관’으로 ‘돌아온’ 점에 주목했다.
(역자 주) 굳이 부연하자면 ≪우루세이 야츠라≫(1978~1987)가 <소년 선데이>에서 연재되었고, ≪메종일각≫은 자매지이자 대상 연령이 조금 더 높은 청년지 <빅 코믹 스피리츠>에 연재되었다.

(중략)

오츠카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건 ≪메종일각≫이 오츠카의 예측에서 벗어나 통과의례의 이야기 형식을 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츠카는 동일하게 전후적 소비사회하에서의 ‘성숙’을 그리던 아다치 미츠루라는 남성 작가의 이름을 거론하는데, 타카하시의 작품에는 약간 이질적인 것이 섞였음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아다치에게는 없고 타카하시에게는 있는 것---그것은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로서 근대의 ‘자유라는 속박’과 대치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서두에서 주인공 소년의 가정에 완전한 ‘타자’로서 출현한 라무는 당초 가정의 파괴자로서 행동하지만, 곧 그의 ‘아내’ 같은 존재로서의 모성을 획득하고, 작품 세계에 있어서의 ‘어머니’로서 기능하게 된다.
≪메종일각≫의 오토나시 쿄코 역시 ‘기병도 대학교수도 될 수 있는’ 세계를 등지고, 사별한 남편을 그리워하며,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새로운 순간들에 가슴 설레면서도, 결코 ‘어머니’로 지내는 것 이외의 가능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란마1/2≫(1987~1996)의 텐도 아카네는 처음에 집 ‘밖’의 남자를 연모하는 소녀로 설정되지만 이내 그 욕망을 단념하고, 넘치는 정념을 표현하는 긴 머리카락을 잘라내며 보다 안쪽으로, 친가의 도장을 ‘어머니’적 존재로서 계승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캐릭터로 재설정된다.
    (역자 주) 접골원 원장. 이름은 오노 토후.
어째서 ‘어머니’는 ‘아이’이자 ‘남편’인 존재에게 ‘딸(娘)’을 보내는 것일까. 그것은 근대라는 자유의 속박을 등지고, 한번은 붕괴했던 전근대적인 ‘어머니’로 회귀한 그녀들이, 그 욕망을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이기 때문이다. 그 태내에 ‘아이’ = ‘남편’을 봉인하기 위해서는, 외부로 향하는 그들의 의지를 꺾지 않으면 안 된다. 아직 보지 못한 타자(소녀)와 만나기 위해, 모빌슈트를 타고 ‘어디까지든 갈 수 있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는 태내의 ‘아이’ = ‘남편’에게 소녀의 가면을 쓴 자신의 분신으로서의 ‘딸’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그 태내에 ‘아이’를 가두고 소유하려 드는 비대한 모성 = 모자상간적인 권력과, 영락한 마치스모가 초래한 부녀상간적인 욕망의 공범 관계의 산물이다. 타카하시 루미코에 의해 완성된 모성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 그것은 비대한 모성과 왜소한 부성의 결탁, 거대한 모자상간적인 구조와 작은 부녀상간적인 구조의 결탁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닫힌 세계가 부여하는 감미로움에 허무주의적으로 의존하고, 토미노 요시유키는 그 중력에 엄청나게 매혹되면서도 동시에 증오를 이어갔다. 그리고 미야자키처럼 허무주의에 패하는 것으로 자신을 지키는 것도, 토미노처럼 증오와 동경 사이에서 분열되는 것도 택하지 않았던 제 3의 작가가 이 5부에서 다루는 오시이 마모루다. 타카하시 루미코의 사실상의 비판자로서 등장한 오시이는, 타카하시가 체현하는 모성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에 대해 가장 자각적인 작가이며, 가장 정면에서 대치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미야자키와 토미노가 그랬듯, 오시이 역시 패한다.

3. 뷰티풀 드리머들의 선후
오시이 마모루가 <우루세이 야츠라>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감독을 맡으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TV시리즈의 인기를 받아 오시이가 감독한 두 번째 극장판 <우루세이 야츠라 2 뷰티풀 드리머>(1984)는, 원작 팬들의 지지를 넘어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팬, 영화 팬 사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으며 오시이의 이른바 ‘출세작’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우루세이 야츠라≫ 팬들이 대체로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던 이 <뷰티풀 드리머>가 사실상 오시이 마모루에 의한 타카하시 루미코적인 것에 대한 비평적 개입으로서 평가된다는 점이다.
<뷰티풀 드리머>의 무대는 라무와 아타루 등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학원 축제 하루 전이다. 꿈마귀(夢邪鬼)라는 요괴의 힘으로 등장인물들의 의식이 하룻밤 자고 나면 리셋되어 ‘학원 축제 하루 전’을 영원히 반복한다. 물론 이 ‘영원히 반복되는 학원 축제 하루 전’이란 당시(1980년대) 소비사회하에서의 젊은이들의 삶---‘정치의 계절’은 먼 과거의 것이 되었고, 역사가 개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게 된 세계, ‘물건[풍요]은 있지만 이야기[정신]가 없는’ 끝나지 않는 일상---의 비유이며, ≪우루세이 야츠라≫라는 작품 그 자체에 대한 비유이기도 했다.
(역자 주) 일본어 발음이 천진함, 순진함, 악의 없음을 뜻하는 無邪気와 같다.
타카하시 루미코가 ≪우루세이 야츠라≫ 원작 만화판을 끌고 가는 기법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는 결말을 연기(延期)하는 것이었다. 결론은 이미 나 있는데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척하는 것, 또는 아타루가 라무에게 결정적인 고백을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진척되는 걸 미루며 고2라는 모라토리엄을 무한하게 반복해서 연장하는 것이다.
<뷰티풀 드리머>에서 오시이 마모루는 이러한 타카하시 루미코의 세계를 영원히 반복되는 학교 축제 하루 전이라는 비유로 그렸다. 꿈마귀는 라무의 ‘언제까지나 이 친구들과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고 싶어’라는 ‘꿈’을 이루어 주기 위해, 그녀와 주위 사람들을 무한 루프 구조 속에 가둔다.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변했음을 차츰 눈치채고,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선다.
타카하시 루미코적인 ‘모성의 디스토피아’를 파괴하고, 그 허구 세계로부터 현실로 귀환하는 것---영원히 계속되는 모라토리엄, ‘끝나지 않는 일상’을 졸업하고, 성숙의 단서를 손에 넣는 것---<뷰티풀 드리머>는 ≪우루세이 야츠라≫의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나아간다. 그러나 오시이에 의한 탈출 = 파괴는 불완전한 형태로 종국을 맞이한다.
<뷰티풀 드리머>의 결말부에서 아타루는 허구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다. 그것은 라무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다. 온갖 미소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그 누구와도 거리를 좁히지 않았던 모라토리엄의 날들을 버리고, 한 아가씨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현실로 가는 유일한 회로로 제시된다.
‘책임을 진다’라는 건 생식(生殖)과 가족 형성의 가능성을 열고, 그것을 끌어안는 것이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 생식을 하고, 본인은 아버지가 되어 어머니가 된 여인과 아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아타루는 꿈속에서 라무에게 고백을 하고 현실로 돌아온다. 진정한 학원 축제 날 아침에 교사에서 눈을 뜬 아타루는, 교실에서 뒤섞여 자고 있던 라무에게 키스를 재촉당한다. 행복한 꿈을 꿨다는 라무에게 아타루는 “그건 꿈이야”라고 속삭이며 입술을 포개려는데 어느새 일어난 급우들이 방해하고, 원작 만화와 TV시리즈의 친숙한 러브코미디가 다시---모태 안에서 반복되는 ‘끝나지 않는 일상’이---반복되기 시작하며 막을 내린다.
이때 ‘3층 건물인 고등학교 교사가 2층 건물로 그려져 있으니 아타루와 친구들이 현실로 돌아온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다’라는 독해가 유명한데, 그러한 세부적인 곳에 주목하지 않아도 이 이야기 전개만으로 충분히 오시이가 타카하시 루미코의 세계를 끝까지 파괴할 수 없었던/파괴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아타루가 귀환한 ‘현실’은 분명 꿈마귀가 만들어 낸 허구는 아니지만, 여느 때의 <우루세이 야츠라>의 세계---타카하시 루미코의 중력에 갇힌 ‘모성의 디스토피아’이고, 등장인물들의 관계성이 영화의 처음과 끝에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뷰티풀 드리머>는 ≪우루세이 야츠라≫의 타카하시 루미코 세계의 구조를 비평적으로 폭로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끝내는 것에는 실패했다.
아타루는 왜 라무에게 고백을 하고 ‘책임을 지는’ 것으로, ‘아버지’가 되는 것으로 꿈의 세계 = 라무의 모태로부터 탈출해 현실로 귀환할 수 없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타루가 현실로의 귀환을 위해 사랑을 고백하고 ‘책임을 지는’ 대상이 그 세계의 ‘어머니’인 라무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메종일각≫의 결말이 성숙과 상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의사 성숙의 결과로서 완성되는 일각관 = 쿄코의 모태 안에서의 모라토리엄의 영속이었던 것처럼, 그 이름을 외치며 ‘책임을 지는’ 것은 이 타카하시 루미코적인 모성의 세계를 완성시키기는 하되 결코 파괴하지는 않는다. 타카하시 루미코의 세계에서 소년이 ‘아버지’가 되는 것은 오히려 모태 = 가정 안에 갇히는 것---모라토리엄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아타루가 라무 이외의 아가씨를 선택하면, 또는 라무가 마음을 바꿔서 아타루 이외의 남성을 선택하면 = 아타루에 대한 라무의 무조건적인(‘어머니’적인) 승인을 철회하면, 타카하시 루미코의 세계는 완전하게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외부로 탈출해서 현실로 귀환하는 것과 ‘아버지’가 되는 것을 같은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시점에서, 좌절은 숙명이다. ≪메종일각≫ 고다이 청년의 성숙이, 최종적으로 일각관이라는 모라토리엄의 영속 안에서 걸음을 멈추어 버린 것처럼.
여기서 토미노 요시유키에 대한 논의를 떠올려 주었으면 한다. <샤아의 역습> 결말부에서 샤아는 라라아라는 ‘어머니’를 (아타루에게 있어서 라무를) 상실했기에 자신은 ‘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을 고백하며, 죽어 갔다. 그렇다면 샤아가 라라아를 잃지 않았다면, 어머니 = 아내 = 딸을 얻고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면 구제되었을까. 답은 아마도, 아니다. 아무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계가 아냐! 퀘스의 아버지 대신 같은 건 될 수 없어.”
그렇다. 토미노에게 있어서 어머니 = 아내 = 딸을 얻어 ‘아버지’가 되는 것은, 여성성과의 공의존 관계에 의한 승인을 사회적 자기실현의 대체물로 삼는 것은 ‘기계가 되는 것’과 같다(그리고 ‘기계가 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한 사상 = 뉴타입을 토미노는 발전시킬 수 없었다). ‘어머니’적인 승인 아래에서 우주세기라는 위사와 모빌슈트라는 임시 신체를 받아 ‘아버지’가 되는 것은 분명 애니메이션 = 꿈속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남성성의 아이로니컬한 표현으로서---즉, 확장 신체적인 디자인으로서---발전해 온 전후 애니메이션 로봇에 대한 자기 비평이면서, 오시이가 빠진 패러독스를 해명할 단서다.
<뷰티풀 드리머>에서 오시이 마모루의 의도는 모태로부터의 탈출에 있었을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애니메이션이 지향해야 할 ‘거짓말’로서, 유토피아로서 그려낸 일본 전후 사회의 초상을 토미노 요시유키는 애니메이션만이 그릴 수 있는 현실 = 디스토피아로서 그려냈다. 그리고 오시이 마모루는 토미노보다 더 명확하게, 더 이른 단계에서 소비사회화 이후의 전후 세계를 ‘모성의 디스토피아’로서 그렸고, 그곳으로부터의 탈출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오시이 자신의 모태회귀적인 욕망을 역설적으로 각인하게 되었다. 오시이는 아타루가 고백을 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그 태내로부터의 탈출 가능성도, 안쪽에서 껍질을 깨고 나올 가능성도 닫아버린 것이다.
이때 이미 오시이에 의한 타카하시 루미코 세계의 파괴는 좌절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뷰티풀 드리머>의 안이한 결말은 오시이에 의한 현실로의 귀환 = 성숙은 힘들다는 표현임과 동시에, 상업적인 요청을 고려한 팬 서비스적인 전개이기도 하다.
오시이가 어느 선까지 자각했는지는 (아마 당사자도) 알 수 없지만, 이 결말에 의해 오히려 ‘아버지’가 되는 것으로는 현실 귀환이 불가능함을 결과적으로 증명해 버렸다. 적어도 마치스모의 획득이라는 방법으로는 이 유토피아/디스토피아에서 탈출할 수 없다.

4. 모럴에 대해
‘아버지’가 되는 것으로 ‘모’성의 디스토피아를 탈출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인간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랬듯) ‘아버지’가 되려 함으로써 모태로부터 탈출할 실마리를 놓치고 거기에 안주하게 된다. <뷰티풀 드리머>의 이야기 전개로부터 유추해보면, 오시이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 ‘어머니’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지 않음을 어느 정도---적어도 그것이 쉽지 않음을---자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절반쯤 패배했음을 깨달으면서도 오시이는 타카하시 루미코적인 세계로부터의 탈출을 지향했다. 그것은 어째서일까. 아타루가 꿈의 세계로부터 탈출해 현실을 목표로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그것은 배제의 논리에 저항하는 ‘모럴(moral)’이다.
<뷰티풀 드리머>에서 라무와 등장인물들의 학교생활은 라무를 사랑하는 요괴 꿈마귀가 만든 완전한 허구 = 꿈이고, 그 모라토리엄의 허구성을 파헤치려는 인물 또는 라무의 ‘연적’으로서 아타루의 관심을 끄는 소녀들은 라무의 무의식을 참작한 요괴에 의해 차례차례 그 세계로부터 배제되어 간다. 자취를 감춘 그들은 거대한 석상 모습이 되어 이 꿈의 세계를 지탱하기 위한 문자 그대로 ‘제물(人柱)’이 된다.
<우루세이 야츠라>가 그리는 영원의 모라토리엄---모태의 요람 안에서 부녀상간적 마치즈모를 탐하는 유토피아를, 오시이는 그 중심인 ‘어머니’적 존재 = 라무의 욕망, 즉 그녀의 사랑의 대상인 ‘자식’ = ‘남편’을 그 태내에 가두기 위해, 괘씸한 존재는 냉철하게 배제해 나가는 디스토피아로서 다시 그렸던 것이다.
이것은 얼핏 보면 한없이 상냥한 타카하시 루미코의 세계 = 모성의 유토피아가, 사실은 철저한 배제의 논리 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오시이로부터의 고발이나 다름없다. 그렇다. <뷰티풀 드리머>는 이 비대한 모성과 거기에 틀어박힌 채 의존하는 왜소한 부성의 결탁으로 드러나는 타카하시 루미코의 세계가, 사실은 강력한 ‘배제의 논리’로 유지되는 ‘모성의 디스토피아’임을 고발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중략)

본문에서
오시이에 의한 타카하시 루미코 세계의 파괴
이 말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큰 스님을 만나면 큰 스님을 죽여라.(모든 얽메임에서 벗어나라. ○○라는 휘광에 짓눌리지 마라.)와 같은 뜻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기 후임으로 루팡3세 극장판을 맡았던 감독에게 전화해서, 루팡을 죽여라. 나는 실패했지만 당신은 꼭 성공하길 빈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지요.
토미노 감독도 신작 건담 감독이 조언을 구하면, 건담을 죽여라라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이마가와 야스히로 감독(G건담)과 죽이 잘 맞지요.)
그걸 인터넷에서는 안티라서, 증오를 담아, 거장을 이용해 자기가 뜨려고 등의 이상한 말로 곡해하고 있던데,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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