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It Yourself
이 이미지는 워크라이프 출판사의 ‘드래곤볼 깊이 읽기’ 뒷날개에 쓴 번역자 소개 부분이고, 세상에 던지는 내 출사표였다.
출판사를 세우고 첫 책에, 애초 계획에도 없던 번역자로 나서면서, 세상에 자신을 소개할 때 뭐라고 정의해야 하나 반추하다 떠오른 문장이
‘없으면 내가 만든다’는 D.I.Y. 정신을 본받아였다.
고3 때이자 킹오파96 시절.
3회 글에도 있듯이 당시는 일본에서 시작된 팀배틀이라는 문화가 핫했고, 친구 백자ㅇ에게 같이 하자고 제안했으나 슈퍼 부끄럼쟁이였던 녀석은 거절. 나는 PC통신에 글을 쓴다.
그 글을 보고 이후에 A-TEAM이 되는 세 친구, 상준, 어색, 영기와 만난다.(전수는 조금 후 합류.)
그해 수능은 11월 13일이었다.
그전까지 시간을 쪼개서 도장 깨기도 다니고... 대방동이 잘한다고 해서 갔다가 46연승하고 허망하게 돌아온 기억. 우연히 들어간 청담동 LG오락실에서 조영욱형을 발굴한 사건 등등... A-TEAM 친구들과 오지게도 놀았다.
당시 나는 내가 꽤 한다고 생각했다. 그 실력을 뽐내고 싶지만 자리가 없었다.
아랑전설2 시절. (자료를 뒤지니 일본에서 가동일이 1992년 12월 10일이라고 하니 우리나라는 1993년, 중3 때이리라.) ‘겜통’이라는 잡지사에서 ‘아랑전설2’ 대회를 코엑스에서 개최했다. 학교 끝나고 후다닥 갔지만 이미 모든 차례가 끝나고, 현장에는 ‘예쁜 엽서 대회’로 아랑전설 캐릭터를 그려서 응모한 흔적만 있었다.
그 기억(원통함?)으로 그냥 대회를 만들었다.
이게 1회 대회다.
당시 주변에서 가장 컸던 ‘개포동 챔피언 오락실’로 장소를 정했고, 오락실 사장님께 딜을 쳤다. 그날 사람 많이 올 테니 96 기계 좀 더 들여 놓아주세요.(기존 2대에서 1대 늘어난 3대로 진행). 예선과 본선 이틀 동안 진행했고, 예선에 100명가량의 사람이 왔다. 오락실 아저씨의 신이 난 얼굴, 본선인 2일 차에는 20명 정도밖에 없어서 풀이 죽었던 얼굴이 기억난다.
‘화제 현장의 괴력’ 같은 일은 없었다. 상준이의 번개를 꺾고 올라갔지만 어색이의 장거한에게 패하고 2등으로 마무리.
1회 대회의 우승 상품은 100원이었다. ‘당신이 우리나라 킹오파 96 1인자입니다’라는 의미를 담아 100원을 주었다.
모여서 놀아보니 재미있었다. 사람들은 팀을 만들기 시작했고, 주말마다 오락실에 모여 배틀을 했다.
개학이 다가오고,
마지막을 크게 장식하고 싶었다.
게임 잡지사를 돌며 “저희 대회하는데, 상품 협찬 좀 해주세요”를 시작했다.
게임매거진의 최수만 팀장님이 “그래? 그럼 빅에이에 가자”라면서 자가용에 태워 김갑환 회장님 집무실로 데려다주셨다.
(빅에이는 유통사, 빅콤은 개발사다.)
1회 대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릴 것으로 예상했기에, 더 큰 장소에서 더 많은 기판(1회 때 3대로 진행해서 진행 속도가 느렸다)을 준비하고 싶었고, 김갑환 회장님은 종로의 네오지오랜드를 대회 장소로 내주셨다.
당시 대유행이었던 UFO캐처의 ‘SNK 캐릭터 열쇠고리’도 상품으로 몇 박스 주셨다(참가자 기념품으로 증정함).
청소년들에게 팔리는 상품이 뭔지 젊은 감각으로 캐치하고 계셨던 회장님과 여러 즐거운 이야기를 나눴더니, 고작 고3이었던 나는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까불었다. 회장님 집무실 벽에 걸려 있던 2미터 사이즈의 마이 시라누이 포스터를 가리키며 “저것도 주시면 안 될까요” 했다가, 집무실 상단에 걸려 있던 일본도로 일도양단 되는 게 아닐까 망상할 정도로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나중에 들으니 (나무위키에 쓰여 있는 것처럼) 과거에는 무서운 분이셨다고.
회장실에서 나와 달봉형과 종로 네오지오랜드로 직행.
실망이었다. 너무 작았다. 1회 대회장의 반의반도 안 되는 사이즈였다.
다음날 다시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리자, 그러면 오금동의 네오지오랜드가 크다고 그쪽으로 준비를 해주시겠다고 흔쾌히 바꿔주셨다. (이 대회장에서 97 발매 후 3회 대회도 치렀다. 투니버스에서 취재를 나왔던 그 장소다.)
(일본의 네오지오월드)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6965388
https://battlepage.com/??=kof.talkforkof.view&no=13661
대학에 들어갔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당시 나우누리의 VG(비디오게이머) 게시판은 3D 대전격투와 2D 대전격투 게시판이 나뉘어 있기는 했지만, 게시판에서 너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기는 분위기상 그렇고, 소모임을 만들고 싶었다.
VG동 운영진에게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고, 1997년 4월 1일에 임시 소모임이 되었다. 활동이 많아야 정식 소모임으로 승격된다는 당부도 들었다.
매일 전산실의 터미널실에 처박혀서 PC통신만 했다. 1학기에 학고를 맞았다. 2학기에는 한번도 출석한 적이 없다. 투고 받고 군대 갔다와서 이 학교를 자퇴할 생각이었다. 학교에 정을 못 붙였다.(복학하고 8학기만에 졸업하긴 했다. 실질적으로는 6학기만 다닌 셈이라 고생했다. 다 자업자득이지 뭐;;;)
4월에 만들어진 임시 소모임이 5월 중순에 정식 소모임으로 승격되었다. GO VG 8 8. SNK사랑모임의 탄생이었다.(배틀페이지 같은 곳이다)
초반에 폭발적으로 활동해서 빠르게 승격됐다고 운영진이 말했다.
이 경험으로 후에 ‘출판사 옆 대나무숲’이 생겼을 때, 초반 트윗 100개 중에 50개는 내가 쓴 글이다. 초반 화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출대숲은 출판사X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계정이다.
나는 출판사X(ㄷㅅ)에 면접을 보러 간 적도 있고, 출대숲은 당시 다니던 출판사 뒤에 앉아 있는 후배가 시작한 프로젝트다. 한겨레 인터뷰는 같이 가서 했다. 후배에게도 초반 100개 중 50개는 내가 썼다고 말하지 않은 상태였고, 기자 앞에서 처음 이야기한 부분이다.
당시 다니는 그 회사가 얼마나 ㅈ같았으면 후배는 출대숲을 만들고, 나는 초반 점유율 50%를 차지했을까. 그렇게 봐줬으면 한다. 자작이나 조작은 아니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043.html
https://www.hani.co.kr/arti/society/media/556841.html
대나무숲의 여파는 어마어마해서 이후 각종 직종의 대숲이 만들어졌고, 무한도전에서도 대나무숲 특집(300회)을 했다.
이후 만들어진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의 탄생에도 약간은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후배는 출대숲만 만들고, 이렇게 수익화로 이어 나가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삽화를 그린 태풍이는 어색이의 고등학교 1년 후배다. 같은 만화부 소속이었고, 동네 오락실에서 어색이의 엄지 손가락 연타를 직관하던 목격자다. 그림에 그려진 손목 부분의 장치는 진동팩으로, 닌64 컨트롤러에 장착하는 형태의 주변기기다. 후대의 사람은 이해 못할 개그라 첨언.
96을 묘사하면서 95 캐릭터인 사이슈가 등장하고, 이마에는 황이라고 써 있는데, 역시 1년 선배인 황준식군을 붕붕 돌려버리고 싶은 태풍이의 속내가 아니었을까 망상한다.
이 꼭지와 다음 달의 꼭지까지 총 3P를 작성했고, 원고료를 세 달 정도 받지 못했다. 속 사정은 게이머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한국 게임잡지 실록”에 실려있다. 이 당시 게임라인은 웅진 소속이었다.
30대 시절에 리더스북(웅진 대표 임프린트)에 면접을 갔는데, 건물이 너무 익숙하다. 묻지도 않았는데 여기서 돌면 화장실이 있고 등등 다 알고 있다. 처음 오는 곳인데 이거 뭐지? 하는 기분을 한동안 품고 지냈다.(가메리네 시절에 티셔츠 들고 찾아간 사진이 있더라.)
동대문 97 대회는 대한민국에 97이 정식으로 들어오기 전에 열렸던 이벤트 매치다. 96 실력으로 겨룬 대회라고 해야 맞다. 그럼 97에서 시스템도 바뀌고 했으니 정식으로 1짱을 가려야지.
겨울에 3회 대회를 열었다. 빅에이 협조로 2회 대회를 열었던 그 공간이고, 투니버스에서 취재도 나왔다.
이 영상은 ‘PC통신에 올릴 겁니다, 복사본이 필요합니다’라고 요청해서 당시 담당 PD님이 직접 VHS 테이프에 본을 떠주신 영상이다. 투니버스 본사로 찾아갔고, 그 자리에서 공략 비디오 사업 제안도 받았다. 당시 버파, 철권은 공략 비디오를 제작해서 판매하기도 했는데, 킹오파도 이걸 하자는 제안이었다.
각 캐릭터 고수 목록이 머릿속에 스쳐 갔지만, 나는 ‘100원짜리 게임 하는 사람들은 돈이 없어요’라면서 거절했다. 당시 게임비도 비쌌던 버파, 철권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대학생이었고, 금전적으로 부담이 덜하니 공략 비디오 같은 상품을 살 여력도 있었다. 하지만 킹오파는 아직 도시락 가방 들고 다니던 사람들 위주로 즐기는 게임이었고, 그들이 비디오를 살 여력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괜히 이런 일 벌이다 PD님 문책 당하면... 이라는 생각이었는데, 돌이켜보니 비디오 대여점 위주로 유통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작은 후회는 있다.
이 영상 속 나에 대해 부연 설명을 조금 하자면,
취재진 도착 3분 전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저 인터뷰는 2트째 성공한 영상이고, 1트는 게임장 밖, 간판이 보이는 곳에서 찍었다. 프롬프트도 없고, 질문도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다. 자, 찍습니다, 한 후에 질문해서 어버버했던 기억이 난다.
그림이 안 이뻤는지 취재진이 들어가서 다시 찍자고 하고, 오락실 지하로 계단 내려가면서 멘트 계속 생각하고, 슛 들어간 후 잊지 않으려고 말하다 중간에 한 번 절고, 마지막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데, 해냈어. 이 긴말을 즉석에서 떠올렸어. 하면서 혼자 흐뭇해 하는 장면이다.
마지막에 붙은 어색-명상의 대전 영상은 다음날 추가로 찍어서 붙인 것이다. 그림이 밋밋해서 추가로 찍었나 본데, 케이블에서 방영할 당시에도 저걸 왜 찍었니 싶은 대전 내용이다. 그냥 화려해 보이는 거 많이 보여달라고 해서 초필 위주로 시연했다고 한다.
이날도 RMS 명상이의 전설.
절대 100원을 안 넣음.
뒤에서 취재진들이 다 기다리고 있는데, 어색이가 100원 넣어 줄 때까지 계속 기다림.
어색 : 야. 진 사람이 100원 넣는 건 국룰 아니냐?
명상 : 응 아니야. 형이 내는 거야.
당시의 배틀은 그런 정겨움이 있었다.
이 경험을 통해 미디어의 파급력을 느꼈기에
우노 츠네히로상이 방한할 때, 처음부터 미디어를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https://cine21.com/news/view/?mag_id=93541
인터뷰 독점으로 할 매체 구상하고, 씨네21에 연락하고, 보도자료 준비하느라 며칠 고심하고 등등의 이야기는 원스 어폰 어 타임 in 워크라이프 부분에서 썰을 풀어보자.
(이 행사는 서울시에서 주관했고, 박인하 교수님이 좌장을 맡았다. 누구를 초청할 것인가 고민할 때 교수님 세미나 소속이었던 강현/강깊은씨가 우노상을 추천했고, 우노상과 연락이 원활하지 않던 서울시가 워크라이프에 도움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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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2월 군번으로 입대했다.
게임 그런 거 해서 무슨 도움이 되냐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내무반 바로 위 고참이 게이머였다. 내 명찰을 보더니 너 미친이리냐고 물었고, 나도 그 고참의 아이디를 떠올리며 본인 확인을 했다. 덕분에 내리갈굼 이벤트가 발생해도 “재명아, 앞으로 잘하자” 한마디로 정리됐다.
맞선임이 막내이던 시절, 밖에서 뭐하다 왔냐는 왕고의 물음에 “게임하다 왔습니다”라고 답하고, “해 봐”라는 말에 이문정주, 도산붕추 같은 시범을 보였단다. 덕분에 나는 “너도 게임하다 왔냐”라는 말만 듣고 재미 없는 놈이라는 꼬리표를 받고 넘어갔다.
지금까지 꺼드럭대며(요즘 유행어. 거들먹거리다) 글을 썼다.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맞아, 저 형이 그랬지, 저 녀석이 그 이벤트 열었지 같은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대부분 달봉형과 함께 한 일이다. 달봉형이 옆구리 찌르면 내가 돌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1회 대회에서 내가 한 일이 10, 달봉형이 0이라면
2회 대회는 나 2에 달봉형 8.
티셔츠 제작은 나 1에 달봉형 9.
거평 97 대회에서 입장객 카운터 셌던 일은 달봉형이 화장실 갈 때 30분 정도 교대 해준 일.
3회 대회는 나 0.1에 달봉형 9.9다.
앞에 나서기 싫다고 나한테 얼굴마담을 시킨 일이 많다. 인터뷰도 원래 달봉형의 몫이다.
결국 사관이 누구냐에 따라 후대의 기록이 달라질 것이다.
나같은 사관이 증언하지 않으면 후대에는 묻힐 인물이다. 가만두면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놀던 판을 깔고, 자비를 들여서 여러 준비도 했는데...
2회 대회(96)부터 원활한 진행을 위해 대회장에 사비를 들여 마이크와 앰프를 설치했다. 이번에 누구 대전할 차례니 몇 번 기계 앞으로 나오라는 방송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대회장이 워낙 시끄러웠고, 누가 앰프의 볼륨을 높여서, 결국 몇 번 쓰지도 못하고 퍽 나갔다. 그 수리비까지 지출했다.
티셔츠를 만들 때도 업체와 여러 번 미팅하고, 그 과정에서 지출이 상당했다. 큰 업체는 물량이 어느 정도 보장이 되어야 일을 하니, 달봉형이 그 비용을 다 부담했다. 나는 온라인에서 애니동 사람들과 쌈박질이나 하고;;;(유현씨 그림 사용 문제였다)
말을 안 하니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 연재의 취지가 ‘달봉형 귀한 줄 알아라’인 이유이기도 하다.
커뮤니티 주최로 여는 마지막 대회였던 4회 대회. 99부터는 게임 ㅈ같다고 달봉형이 흥미를 잃었다.왼쪽이 달봉형, 오른쪽이 게이머즈 기자로 활동했던 나리디 승민이.





















